어떤 소송

🔖 날 약 올리려 할 때면 모리츠는 내가 예술가가 됐어야 했다고 말하지. 그 애는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나를 망쳤다고 생각했지. 눈앞에 보이는 대상뿐 아니라 보는 자신도 엄청난 원자 소용돌이의 일부분이고 그런 원자 소용돌이에서 만물이 생겨난다는 걸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어떤 대상을 관찰하며, 심지어 어떻게 사랑하는 존재를 바라볼 수 있을까 하고 모리츠는 물었어. 두뇌, 우리의 유일한 관찰 도구이자 이해 도구인 두뇌가 관찰 대상, 이해 대상과 같은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걸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그러곤 모리츠는 소리쳤지. 스스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물질이라니, 뭐란 말이지? 하고.

그 애는 사랑을 위해 살고자 했어. 그 애 말을 경청하다 보면 사랑이란 그저 그 애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란 걸 알 수 있었지.

천공기처럼 뇌에 각인을 찍어 이후 그 길로만 생각이 흐르도록 하는 문장들이 있어.


🔖 “꿈속에서 나는 삶을 위한 도시를 보네. …타인에 대해. 도시에 대해. 삶에 대해. 그곳에서 나는 맨발로 공사장을 지나가며 지켜보네. 진창이 내 발가락 사이사이로 삐져나오는 걸.”

“유치하고 끔찍해. 시인은 가둬버려야 해.”

“벌써 그러지. 대중 선동죄로 팔 개월.”


🔖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마녀는 울타리 귀신이야. 울타리 위에 사는 존재지. 빗자루는 원래는 끝이 갈라진 울타리 버팀대였어. 울타리는 경계선이야, 미아. 울타리에 올라탄 여자는 문명과 야생 사이 경계선에 머물러. 이쪽과 저쪽, 삶과 죽음, 몸과 정신 사이에. 긍정과 부정 사이, 신앙과 무신론 사이에. 그녀는 자기가 어디 속하는지 몰라. 그녀의 영역은 그 사이야.


🔖 넌 그렇게 영리했어. 그 다음부터 나는 ‘비가 온다.’라고 말할 대마다 씩 웃지 않을 수 없었지. 비가 오나? 지금이 대체 무슨 계절이지? 누구나 창 앞 어두운 나무우듬지나 길 건너편 비스듬한 검은색 지붕을 봐야 해. 비가 오는지 알아낼 수 있게 빤히 바라볼 게 뭐라도 있어야지. 우리에겐 칠흑에 대한 기본권이 있어. 내가 그걸 위해 노력할 거야. 우리가 조금씩 어둠에 적응하도록 밤이 만들어졌어. 매일 밤 우리가 죽음에 적응하도록 잠이 발명됐어. 불을 꺼. 때때로 긴 생각의 여로 끝에 나오는 결과는 지금이 가을이라는 것뿐이지.